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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1 11:36 수정 : 2019.03.21 11:50

차별, 혐오가 담긴 미디어 콘텐츠를 수집, 기록하는 ‘핑크노모어’ 캠페인을 시작한 ‘정치하는엄마들’의 (왼쪽부터) 강미정, 장하나, 조은아 활동가. 박다해 기자

‘핑크노모어’ 캠페인 출범한 ‘정치하는엄마들’
미디어 속 혐오·차별 콘텐츠 아카이빙
“BBC처럼 제작 가이드라인 도입 촉구할 것”

차별, 혐오가 담긴 미디어 콘텐츠를 수집, 기록하는 ‘핑크노모어’ 캠페인을 시작한 ‘정치하는엄마들’의 (왼쪽부터) 강미정, 장하나, 조은아 활동가. 박다해 기자

“7살 딸이 또래 친구와 집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 다이어트해야 돼’라고 하길래 깜짝 놀랐어요. 5∼6살 때 아이들 장난감 소개하는 유튜브 방송을 보여줬거든요. 거기서 (크리에이터들이) ‘뚱뚱해’, ‘살쪄서 옷 작다’ 이런 말을 여과 없이 하다보니 아이들이 그대로 수용하더라고요.” (강미정 활동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왔더니 딸이 묻더라고요. 왜 엄마는 ‘아빠 머리’ 하냐고요. 장난감을 사러 마트에만 가도 인형은 여아용, 로봇과 자동차는 남아용으로 구분돼있어요.” (장하나 활동가)

8등신의 날씬한 여성,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한 여성 캐릭터, 분홍색 옷을 입은 얌전한 여자아이와 파란색 옷을 입고 씩씩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남자아이… 미디어는 차별을 답습하고, 강화하고, 확산한다. 주로 특정 성별에 대한 역할과 고정관념을 그대로 재현하면서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은 지난해 펴낸 ‘2018년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보고서’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내는 영웅적 면모를 보여주는 주인공 캐릭터는 대부분 남성이 담당하고 있다. 여성 캐릭터는 주로 돌봄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보다 사소한 사건에 투입되는 경향을 보였다”고 짚은 바 있다.

‘국민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리는 뽀로로도 성차별적인 묘사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자 캐릭터로 등장하는 ‘루피’는 유일한 분홍색 캐릭터이다. 루피는 뽀로로 1기 전체 52편 가운데 11편에 등장하는데 그중 10편은 친구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뜨개질을 한다.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의 조은아 활동가는 “다른 남자아이 캐릭터들은 경쟁하거나 놀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데 견줘 루피는 자주 울고 쉽게 삐지고 그러다 어느새 혼자 풀어버리는” 식으로 묘사된다며 “차별의 기반은 결국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라고 했다.

‘정치하는엄마들’이 지난 14일 혐오, 차별, 고정관념을 담은 콘텐츠를 수집,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방송 제작 관련 제도를 개선하는 ‘핑크노모어’ 캠페인을 시작한 이유다. 20일 서울 중구 서울시엔피오(NPO)지원센터에서 만난 강미정, 조은아, 장하나 활동가는 “혐오, 차별, 고정관념을 담은 미디어 감시 활동을 하는 건 결국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했다.

‘정치하는엄마들’이 분석한 EBS 애니메이션 여자 캐릭터의 특징. 대부분 분홍색이고 감정 기복이 심하고 상냥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핑크노모어캠페인 누리집
강 활동가는 장난감 회사가 직접 애니메이션 제작과 배급에 참여하면서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이 반영된 상품까지 적극 판매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시크릿 쥬쥬’는 ㈜영실업이 배급, ‘소피루비’는 ㈜손오공이 제작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속의 고정된 외모 기준을 보여주면서 ‘저렇게 보여야 예쁘구나’란 인식을 아이들이 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상품 판매하고도 이어져요. 만화 속에서 화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매장에 가면 ‘화장하는 장난감’ 키트가 있는 식이죠. (아이들이) 내 모습 자체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예뻐지려면 지금의 모습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예요.”

시크릿쥬쥬와 같은 애니메이션, 여성을 대상화한 가수 지코의 뮤직비디오, 성역할 고정관념이 반영된 동요 ‘상어가족’, 음식을 여성 연예인의 몸매에 빗댄 자막을 사용한 ‘백종원의 3대천왕’ 등 예능프로그램들은 ‘핑크노모어 캠페인’ 누리집에 고스란히 기록됐다. 이들은 비단 여성과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성차별뿐만 아니라 인종, 장애인, 외모, 학력, 경제력, 지위, 직업을 기반으로 한 차별 사례도 제보받고 있다.

왜 직접 나설까.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영유아 프로그램은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다.” 장하나 활동가는 지난해 방심위 회의록을 전수조사한 결과 영유아 프로그램 심의에 대한 공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각 방송사에 자체 심의위원회가 있지만, 어린이프로그램은 대개 학습효과에 초점을 맞춘 심의만 이뤄질 뿐 인권 감수성 측면에서 심의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등급분류 심사 때도 주요 항목으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조 활동가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7가지 등급분류 항목(주제·선정성·폭력성·대사·공포·약물·모방위험)이 있지만 혐오와 차별을 걸러내기엔 역부족”이라며 “가이드라인 분류에도 혐오, 차별 관련 항목이 명확하게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캠페인의 목표는 교육방송(EBS),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등 공영방송사에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 제작 가이드라인과 같은 사례를 도입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비비시의 제작가이드라인은 프로그램 감수 책임자와 콘텐츠 제작자가 △성적 욕설 △인종·민족차별적인 말 △성적이거나 성차별적인 혹은 성정체성에 관한 욕설 △질병이나 장애에 관한 경멸적인 말 등을 써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숙고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또 “콘텐츠에 따라서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편견과 단점을 반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영속화해서는 안 된다”, “부주의한 또는 의도하지 않은 스테레오타입(고정관념)에 시청자가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등 인물을 묘사하는 데 있어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성평등 방송프로그램 제작 안내서를 발표했다가 비난여론에 부닥친 게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세 활동가는 “비난을 받더라도 하겠다”고 말했다. 이들의 각오엔 양육 당사자로서 느끼는 위기감이 녹아있었다. “편향된 기준에 아이들이 영향을 받고 행복을 빼앗기며 성장하는 데 대해 브레이크를 걸고 싶다”고 강 활동가는 말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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