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07 18:00
수정 : 2019.04.11 10:43
[낙태죄, 존폐 논쟁을 넘어] (상) 헌법심판 앞둔 여성들의 현실
실제로 약 구입 시도해보니
판매업체 통해 채팅방서 문답 뒤
20분 만에 ‘미프진’ 구입 가능
불법 경로로 약 유통돼 여성 불안
WHO등록약, 중절 성공 90% 넘는데
한국에선 약물 중절 상당수 추가 수술
“중국 시판 약 등 나돌아도 검증 안 돼”
유산 유도약 합법 도입 논의 시급
이달 초 헌법재판소가 형법 269조 1항(자기 낙태죄)과 270조 1항(의사 등의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2012년 합헌에 이어 두번째 결정을 앞두고, 낙태죄 존폐를 넘어 국가가 여성의 건강과 재생산권 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이냐로 논의가 확장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여성의 건강권 보장 차원에서 유산 유도약 도입 논의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있다.
|
안전한 임신중단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지난해 8월 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임신중단 약물인 ‘미프진’을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겨레DB
|
“마지막 생리 시작일이 언제인가요?” 첫 질문을 받고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임신중절에 사용되는 유산 유도약 미페프리스톤(미프진)을 판매한다는 ㄱ업체를 통해 약을 구입하는 절차는 예상보다 더 간단했다. 구입할 뜻을 밝히니 모바일메신저 오픈채팅방 주소를 안내했다. 채팅방에선 간단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먼저 이 약을 복용해도 되는 건강상태인지를 확인했다. 나이, 키·몸무게, 최근 복용 약물, 자궁 내 피임장치(IUD) 사용 여부, 유산·임신중절수술 경험, 그리고 임신중절이 정말 본인의 뜻이 맞는지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묻는 쪽이 자격을 갖춘 의료인인지는 물론 알 수 없었다.
“불법 아니냐”고 묻자 “미국이나 유럽 등 119개 국가에서는 합법이니 안심하셔도 된다. 비밀을 보장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부작용이 생기면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병원에 가서 ‘임신을 했는데 복통과 하혈이 있어 내원했다’고 말하면 된다”고 했다. 임신 7주 이하면 39만원, 7∼10주면 59만원을 내라는 안내가 이어졌다. 누리집에 구매 신청 글을 쓰면 2∼5일 안에 택배로 받을 수 있다. 돈을 조금 더 내면 퀵서비스로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 “미국의 미프진 제네릭(복제약) 처방제로, (효능이) 정품과 같다”고 안심시켰다. ㄱ업체는 구매자의 후기라며 채팅방에서 나눈 대화를 갈무리한 사진을 올려두기도 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 약이 정말 믿을 만한지, 제대로 된 상담인지 알 방법이 없다. 막연한 희망에 기댈 뿐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ㄱ업체와 같은 사이트를 단속한다. 미프진이 무허가 의약품이란 이유다. 형법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경우’를 처벌한다. 식약처 관계자는 “약물을 이용한 인공임신중절의 불법 여부 판단은 헌법재판소의 몫”이라며 “(식약처로선) 일단 방송통신위원회에 사이트 차단 요청을 하는 등 단속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낙태죄 조항은 법과 현실의 괴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여성은 안전을 담보 잡힌다.
문제는 불법의 덫에 갇힌 유통방식이라고 의료인들은 말한다. 미프진은 2005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안전성과 효과를 인정받아 필수의약품에 등록된 약물로, 전세계 67개 나라에서 사용한다. 세계보건기구는 임신 초기 가장 안전한 임신중지 방법으로 미프진과 같은 약물을 이용한 임신중지를 권고한다. 수술이나 마취가 필요 없는데다 비용이 저렴하고 성공률도 90∼98%로 높다.
하지만 한국에선 사뭇 다른 결과가 나온다. 지난 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임신중절 경험이 있는 756명 가운데 10%가량인 74명이 약물을 사용해 인공임신중절을 했다고 밝혔고, 이들 중 53명은 “의료기관에서 추가로 수술을 받았다”고 답했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고경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사는 “미프진이 승인이 안 된 상황에서 인터넷에서 고가로 팔리고 있는 약이 진짜인지 유사품인지는 검증이 어렵다”며 “실제로 중국에서 시판되는 효능이 보장되지 않은 약이 들어오기도 해 (임신중절) 실패율이 올라가고 재수술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세계적인 기준과 동떨어진 규제가 위험률을 높이는 셈이다.
불법과 단속, 무지와 이익이 엇갈리는 현실에서 외면당하는 건 여성의 건강권이다. ㄱ업체의 누리집에 3월 한달 동안 올라온 구매 신청 글은 594건에 이른다. 보사연 집계를 훌쩍 넘는 수치다. ㄱ업체 외에도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을 통해 유산 유도약을 판다는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이들은 마치 공식 판매자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결국 “확인되지 않는 불법 브로커”라고 여성·의료계는 지적한다. ‘위민온웹’처럼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활동하는 국제비영리단체의 질문지를 일부 참조해 그럴듯한 상담절차로 포장하지만 이조차 제대로 구성돼 있지 않다.
산부인과 전문의 최예훈씨는 “약물 사용법은 키·몸무게와 상관없어 물어볼 필요가 없다”며 무허가 판매업체의 비전문성을 지적했다. 이어 “(위민온웹 같은 국제단체는) 의사의 진료 없이 구입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더 많이 한다”고 짚었다. 실제로 국제단체들은 임신중지 결정을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응급처치가 가능한 전문병원에 1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지, 곁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등을 상세하게 묻고, 이후 경과를 추적관찰한다.
한국에선 의료진으로부터 제대로 된 복약지도와 상담을 받는 것이 불가능해 불완전 유산 등이 발생해도 여성이 홀로 감당해야 한다. 약값을 부담하기 어려운 미성년자나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일수록 형식적인 상담절차조차 거치지 않는 곳에서 약을 구입할 가능성이 높아 위험도 커진다.
유산 유도약 도입 논의는 낙태죄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과 관계없이 빨리 시작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행 모자보건법이 이미 인공임신중절 허용 사유를 명시하고 있으므로 이런 경우만이라도 약물 사용을 허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영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현실과 유리된 법체계가 여성의 위험을 방치하고 있다”며 “의료진에게 제대로 진단받고 상태에 맞는 약을 복용한 뒤 후유증을 관리할 환경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