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5.12 13:26 수정 : 2019.05.12 20:30

여성주의 에스에프(SF) 소설집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를 펴낸 작가 5명 (왼쪽부터 이진주, 오정연, 디시디시, 이루카, 윤여경)을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여성주의 SF 단편선집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 출간
육아, 모성, 트랜스젠더, 퀴어, 장애여성 등 폭넓은 주제 담아
“SF는 현실에 대한 탈출이나 혁명의 도구”
“여성주의와 SF 만날 때 SF 장점 끌어올릴 수 있어”
텀블벅 후원 통해 선 출간, 18일 독자들과 북토크 예정

여성주의 에스에프(SF) 소설집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를 펴낸 작가 5명 (왼쪽부터 이진주, 오정연, 디시디시, 이루카, 윤여경)을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혁명을 가능케 하는 건 상상력이다.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이곳’의 변화가 더디고 지난할 때, 잠시 숨 쉴 수 있는 통로를 내어주거나 희망을 놓지 않게 해주는 힘 역시 상상력이다. 현실을 비틀어보는 것을 넘어 다른 차원의 세계를 넘나드는 에스에프(SF)는 바로 이런 상상력을 극대화한 장르다. 여성주의 에스에프(SF)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여성과 남성의 성 역할이 뒤집힌 세계를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역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보여주는데,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이 널리 확산하는 과정에서 재조명을 받으며 국내에서만 20만부가 넘게 팔렸다.

오는 17일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3주기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인 ‘아이다호 데이’(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한 1990년 5월17일을 기념하는 날)를 앞두고, 다른 시공간을 상상해볼 수 있게 만드는 여성주의 에스에프(SF) 단편선집이 나왔다. 지난달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720여만원의 후원을 받아 세상에 나온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에디토리얼)다. 김하율, 디시디시(dcdc), 오정연, 윤여경, 이루카, 이산화, 이진주 작가가 각각 집필을 맡았다. <체체파리의 비법>(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아작) 등 대표적인 에스에프(SF)소설을 번역해 온 이수현 작가는 ‘함께 읽으면 좋을 에스에프(SF) 여성주의 소설’ 추천작을 소개하는 꼭지를 덧붙였다. 지난해 여름,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과학책방 ‘갈다’에서 시작돼 석 달 동안 이어진 여성주의 에스에프(SF)소설 독서 모임 ‘페미 숲 갈다’에서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더 많은 여성서사를 지면에 옮기고 싶다는 데 뜻이 모였다.

사실 에스에프(SF)와 여성주의의 만남은 필연에 가깝다. 이성애 규범과 젠더 이분법 등 성별 고정관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뿌리 깊은 젠더 권력구조를 뒤집어봄으로써 소수자를 조명하는 여성주의도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상상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옥타비아 버틀러,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어슐러 르 귄 등 내로라하는 에스에프(SF) 작가들이 펴낸 여성주의 작품들이 에스에프(SF)의 계보를 탄탄하게 떠받치고 있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에스에프(SF)의 가장 큰 장점이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익숙한 사고 틀에서 벗어나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라면, 여성주의가 에스에프(SF)와 만났을 때 그 장점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이수현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700여만원이 넘는 후원을 받았다. 오는 18일 후원자들을 대상으로 북토크 행사를 연다.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이하 ‘우먼볼’)가 보여주는 세계도 우주만큼이나 광활하다. 만약 감정을 호르몬제로 만들어 투여할 수 있게 된다면 ‘모성 호르몬’은 어떤 요소로 구성될까? 인류가 화성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된 날에도 육아는 계속 여성의 몫으로 남을까? 트랜스젠더 여성과 게이, 시스젠더(신체적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 여성이 연대해 ‘아이언맨’과 같은 트랜스휴먼(과학기술을 이용해 신체 기능을 변화시킨 종)과 싸우는 건 어떤 모습일까? 브이아르(VR·가상현실) 기술 등을 이용해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그 기술은 장애 여성의 성과 사랑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서로 싸우는 모습은 어떤 양상을 띨까?

7편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물음이 간단치만은 않은 건, 지금 이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젠더 이슈를 또 다른 세계를 기반으로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트랜스젠더와 퀴어, 장애여성의 목소리를 타자화하지 않고 담아낸다. 젠더 갈등, 육아와 경력단절, 다크웹(아이피 주소 추적이 어려운 인터넷 공간)을 넘나드는 디지털 성범죄도 함께 다룬다.

왜 이런 기획을 시작했을까. 최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본사에서 만난 작가들에게 물었다. 이들은 에스에프(SF)가 여성주의와 만남으로써 “현실의 권력을 해체해서 재구성할 수 있”(윤여경)고, 현실에 대한 “탈출이나 혁명의 도구”(이진주)가 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과학기술을 활용해 사회적 약자를 조명하고, 후미진 곳을 드러내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리게 만드는 힘이 에스에프(SF)에 있다는 거다. 남성 작가로 참여해 “여성들의 고민과 목소리를 빼앗아오는 건 아닐까” 거듭 조심스러웠다고 밝힌 작가 디시디시(dcdc)는 “화성인, 인공지능, 좀비가 지구를 지배하는 상황을 (SF를 통해) 즐기면서도 정작 여성의 인권이 나아진 사회를 상상하지 못한다면 염치없는 일 아닐까요?”라고 되물었다.

에스에프(SF)와 여성주의를 잇는 또 다른 작당은 벌써 시작됐다. 이루카 작가는 “지금 (페미니즘을 통해) 연대하고 공감하는 여성들이 할머니가 돼서도 같이 게임을 즐기며 사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며 “정상가족의 프레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교감하고 연대하며 받는 위로와 공감을 담고 싶다”고 했다.

오정연 작가는 “다른 행성으로 모험을 떠나는 소녀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딸을 키우는 그는 “여자아이들이 볼만한 모험 서사가 정말 없다”며 “소녀가 모험하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다”고 했다. 디시디시 작가 역시 ‘캡틴 마블’과 같은 슈퍼히어로인 한국 여성의 이야기를 집필 중이다.

<우먼볼> 작가들은 오는 18일 서울 마포구 ‘프리스타일 스페이스’에서 후원자를 대상으로 북토크 행사를 연다. 일반 독자들은 이르면 14일부터 온라인서점 ‘예스24’에서 <우먼볼>을 만나볼 수 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