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13 19:17
수정 : 2019.05.20 20:34
【짬】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김진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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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7일 여성주의 카페 울프소셜클럽에서 만난 김진아 대표는 “손님들이 카페 메뉴 가운데 버터크림 헤븐라떼와 키라임파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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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단절되지 않는다.’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김진아씨가 이달부터 대중과 만나는 벨기에 맥주 스텔라 아르투아 광고를 위해 뽑은 카피다. 광고 모델은 40대 여성 김서형(배우), 김윤아(가수), 송은이(개그맨)씨다. “여성이 자기 자리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역사를 이뤄나가는 모습을 강조했어요. 제가 3년 전 여성주의 관점에서 만든 화장품 광고(‘이 나라는 선영이에게 덜 해로운 곳이 되었나요?’)를 보고 글로벌 광고대행사 위든앤케네디 도쿄사무소 쪽에서 참여를 요청했죠. 여성 타깃 맥주 광고를 하려는데, 한국 현실이 익숙하지 않으니 같이 하자고요. 지난해 12월 말부터 5개월 정도 작업했죠.”
‘꿈은 단절되지 않는다’ 카피는 사실 김씨의 ‘자기 주문’이기도 하다. 올해 20년 차 광고인인 그는 9년 전만 해도 대기업 광고대행사의 잘 나가던 카피라이터였다. 하지만 2010년 어느 날 순간의 결정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자신보다 능력이 처진다고 생각한 남자 동료가 먼저 승진하는 걸 보고 사표를 던진 것이다. 퇴사 뒤에는 광고프로덕션을 차렸다. 2013년 제일기획과 함께 만든 코웨이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캠페인으로 대한민국 광고대상까지 받았다. 이런 성취에도 마흔 가까운 여성이 광고업계에서 설 자리는 많지 않았다. 일감은 줄어들고 재취업도 어려웠다. 우울감이 커지며 정신과 상담까지 받았단다.
‘울프소셜클럽’. 그가 2017년 3월 “보란 듯이 살아남겠다”는 의지로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낸 ‘여성주의 카페’다. “고독하지만 고립되고 싶지 않은 여성들이 만나는 공간을 목표로 냈죠.”
기자가 찾은 지난 7일 오후 카페는 손님으로 꽉 찼다. 모두 젊은 여성이었다.
“울프는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에서 따왔죠. 작가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울프는 또 늑대이기도 해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라는 책을 보니 늑대와 여성이 심리적으로 공통점이 많더군요. 여성의 야성적 자아가 가부장제에 억눌려 온 거죠.” 카페는 여성 프리랜서들을 연결하거나 여성주의 책을 주제로 토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미투 시위대가 떠들썩하게 뒤풀이를 하기도 한다.
대기업 광고사 경력 20년 차 광고인
광고사 세워 대한민국 광고대상도
40대 여성 경력단절 문제 절감하며
여성주의 카페 ‘울프소셜클럽’ 내
여성 프리랜서 네트워크 지원도
최근 ‘우먼카인드’ 기고문 모아 출간
그는 최근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바다출판사)란 긴 제목의 책을 냈다. 마흔이 다 되어 만난 페미니즘 시각에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기 위한 길을 모색했다. 반성도 담았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2000년 들어간 광고회사에서 처음 만든 광고는 지금 보면 지독하게 여성 혐오적이다. “여성의 가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위스키 광고를 만들었죠.” 서른이 되기 전에는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 배우들처럼 출근하다시피 클럽을 다니고 별의별 남자를 다 만나는 삶을 살았단다. “꾸밈 중독과 남자 중독에 빠진 삶이었죠.”
페미니즘과의 만남은 언제? “4년 전 ‘나는 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 운동이 있을 때 조금 관심을 가졌죠. 그러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지자 제가 그간 겪은 유사 경력단절 문제가 겹치면서 내 문제가 나만이 아니고, 여자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란 생각이 들더군요. 모든 게 하나의 맥락에서 읽혔죠. 퍼즐이 맞춰진 느낌이었어요.”
생각이 바뀌고 가장 큰 삶의 변화는 “여자를 덜 미워하게 된 점”이란다. “너무 다행스러워요. 그동안 여자인 제가 얼마나 같은 여성을 혐오했는지 깨달았죠. 사실 광고회사에서 팀장 노릇을 할 때도 남자 직원들을 더 선호했거든요.” 현재 카페 직원들은 모두 여성이다. 원두도 여성이 로스팅한 걸 일부러 산다. 여성이 자기 몫을 키우려면 서로 일감을 몰아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책의 큰 주제는 ‘여성의 파이 키우기’이다. “공적으로는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 하는 여성 임원 할당제를 법제화하는 것이죠. 우선 공기업이라도 하면 좋겠어요. 사적으로는 여성들이 고립되지 않고 여성 연대를 꾀하는 거죠. 짝을 만나 결혼하는 이런 공식 같은 삶과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상상해보길 권하고 이런 얘기를 만나서 같이 하고 싶어요.” 그는 30대 중반 결혼해 2년 뒤 탈혼했단다. 책에 “결혼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굴욕감을 카펫처럼 바닥에 깔고 간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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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대표가 최근 낸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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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연대는 체험에 기반을 둔 조언이다. 9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하루 만에 사표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사표를 던지지 않는다면 내가 능력이 없거나 겁이 많아서라고 생각했어요. 주변에 여자도 많지 않았죠. 다들 일에 치어 이런 얘기를 나눌 여건이 되지 않았어요. 여성주의 책은 많았지만 제 반경 안에는 들어오지 않았죠.” 취향이나 코드 차를 이유로 관계를 좁히기만 했던 자신의 경험을 들추며 “여자들이 알아서 고립의 길을 가는 것은 남성 중심 조직이 바라는 것”이라고도 했다.
광고업계의 남성 중심성은 변화가 있을까? “더 심해졌죠. 여유가 있을 때는 그래도 너도 먹으라고 (여자 직원들을) 귀엽게 봐주기도 했어요. 지금은 남성들도 밥그릇 지키기가 힘들어 여유가 더 없어요. 광고업계 임원의 남성 편중은 더 심해졌죠.”
자본주의 꽃이라는 광고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미스터 션샤인> 주인공 이병헌과 김태리의 나이 차를 봐요. 남·여 주인공 나이 차가 갈수록 커져요. 위스키 광고 남자 모델은 수트 입고 쿨하게 나와요. 소주 여자 모델을 보세요. 이효리는 섹시하고 도발적이기라도 했잖아요. 지금은 어리고 수줍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슬처럼 나와요. 여성은 주부이고 남자는 일하는 아버지라는 스테레오타입은 여전해요.”
그가 보기에 광고의 변화를 이끄는 힘은 대중의 압력이다. “대중이 무시 못 할 힘으로 ‘여성 혐오적이다’고 외칠 때 변화가 와요. 그때에야 광고사 안에서도 ‘젠더 감수성 키워야겠다’ 그런 말이 나오죠. 관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아요.”
그가 쓴 글엔 야망이란 단어가 두드러진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야망이 컸단다. “일부러 야망이란 단어를 썼어요. 여자가 쓰면 안 될 것 같은 단어로 인식되잖아요. 여자가 야망이 있다고 하면 부정적으로 보죠. 교사를 하신 엄마가 욕심도 많고 리더십이 있으셨죠. 출산 뒤 퇴직하고 그 뒤로 복직하려고 많이 노력하셨어요. 잘 안 됐죠. 사업도 쉽지 않았어요. 당당하고 강한 여자한테서 나오는 빛이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지는 걸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시들지 않는다. 지지 않는다. 쉽게 잘려나가지 않는다. 나는 꽃이 아니다. 불꽃이다.’ 그가 3년 전 한 재벌기업 광고캠페인 참여를 위해 제안한 카피다. 기업은 이 카피를 사지 않았지만 뒤의 두 문장은 여러 여성 시위에 등장하면서 생명의 불꽃을 얻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도 ‘나는 꽃으로 살고 있소. 하지만 나는 불꽃이오’라는 대사가 나오더군요. 광고주가 사지 않는 카피가 공감하는 여성들로 인해 구조되고 생명을 얻는 과정을 시켜보는 새로운 경험을 했어요.”
‘유사 경력단절’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광고 일에 대한 열망도 숨기지 않았다. 실력도 자신했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브랜드에 접목하는 게 제가 잘하는 일이죠.” 자신감의 근거가 궁금했다. “제가 박카스 광고를 많이 했어요. 박카스 광고는 특히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거든요.” 2010년 전파를 탄 ‘우리 아들’ 편을 들었다. “커리어 우먼인 엄마가 회사 일을 끝내고 후다닥 집에 와 아들한테 밥을 해주면서 아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큼 나한테 힘을 주는 것이 없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 아들 누구 꺼?’라고 묻죠. 아들 답은 엄마가 아니라 ‘아영이 꺼’였죠. 이 답에 엄마는 배신감을 느끼죠. 광고에 요즘 일하는 여성들이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담으려 했죠. 반응도 좋았어요.”
페미니즘과 만나기 전 삶에 대한 반성문이 너무 솔직하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우리 세대의 반성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얼짱이나 케이-뷰티 그리고 소비주의 문화 확산에 일조했는데 시치미를 뚝 떼고 미래로 가자고만 할 수 없잖아요. 개인이 가진 소비권력도 무시 못 하는데 많이 남용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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