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올림픽’이 끝나고 태어났다. 스무살이 되던 해, 실력만 있으면 유리천장쯤은 부술 수 있다는 ‘알파걸’이 등장했다. 서른이 되자 직장에선 자책감을, 가정에선 죄책감을 느끼는 ‘슈퍼우먼’ 선배들이 보였다. 여성의 생존과 성공에 대한 서사는 늘었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판의 기울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 판 자체에 균열을 내는 방법은 없을까. ‘알파걸’도 ‘슈퍼우먼’도 주지 못한 답을 찾고 싶어, 또래 여성들을 만나러 나섰다.
페이스북 커뮤니티 ‘스타트업 여성들의 일과 삶’을 운영하는 김지영씨는 “스타트업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도 마땅한 선배 여성을 만날 수 없었다”는 개인적인 고민 끝에 커뮤니티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사진 황금비 기자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떨쳐내지 못했다. 2016년 결혼을 하고난 뒤 왕복 3시간이 걸리는 회사와 집을 오가면서도 잘 차려진 저녁상을 만드는데 힘을 쏟았다. 저녁 10시가 넘어 들어오는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구도 압박을 하지 않았지만 으레 사회가 요구하는 ‘아내’의 역할에 자신을 옭아맸다. 같은 업계에 있는 기혼 여성 선배에게 조언을 얻고 싶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6개월 동안 탈모로 고생을 하고 아프고 나서야 겨우 조금씩 강박에서 벗어났다.
‘89년생 김지영’씨가 ‘스타트업 여성들의 일과 삶’(스여일삶) 페이스북 커뮤니티를 만든 이유다. 2017년 11월 처음 탄생한 ‘스여일삶’ 커뮤니티는 2년이 채 안 돼 페이스북 사용자 2600명이 가입한 대형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한국 커뮤니티로선 유일하게 ‘페이스북 커뮤니티 리더십 프로그램’ 지원대상에 뽑혔다.
출발점엔 운영자 김지영씨(30) 개인의 고민이 있었다. 결혼을 한 그는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스타트업 업계에서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려움을 나눌 동료나 도움을 받을 출산·육아 관련 제도를 찾기 어려웠다. 같은 업계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고민과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만든 것이 ‘스여일삶’의 시작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워워크 역삼점에서 김씨를 만났다.
#1.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꼭 한 번씩 울게 되더라고―안녕! ‘스여일삶’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소개해줄래?지영 스타트업 여성들을 연결하고 힘을 북돋기 위해 온·오프라인에서 다양한 모임을 하거나 콘텐츠를 나누는 활동을 하고 있어. 온라인에서는 아무래도 가벼운 정보공유나 주최하는 행사 등을 홍보한다면 오프라인에서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들, 업무에 대한 고민과 그걸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나눈다고 보면 될 것 같아.
―오프라인 모임은 보통 어떻게 이뤄지는지 궁금해.지영 특정 주제를 갖고 하는 모임도 있고, 그런 것 없이 “우리 밥 먹어요”하는 모임도 있어. 밥 먹자는 모임은 정말 말 그대로 주최하는 지역 근처의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여성 분들이 나와 같이 밥먹으면서 요즘 뭐가 힘든지, 개인적인 고민이나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것에 대한 고민들을 나눈다고 보면 될 것 같아. ‘브랜딩’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나 ‘핀테크 스타트업’에 있는 여성들 모이라는 것처럼 특정 업종이나 직무에 있는 사람들이나 ‘20대’처럼 특정 나이대로 나눠서 진행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명상’ 모임을 개최하기도 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어ㅎㅎ
―처음 오프라인 모임을 했을 때도 기억나?지영 응, 지난해 3월부터 오프라인에서 만났는데 그 때는 한 달에 한 번 ‘점심 벙개’ 콘셉트로 했어. 최근에는 남성 분들도 나오기 시작했지만 초창기엔 특히나 여성 분들만 오셨었거든. 그런데 매번 오는 멤버들은 바뀌어도 꼭 한 번씩 같이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 있었어. 여성들끼리 있다는 게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편안한게 있잖아.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여성으로서 개인적인 삶을 이어가는게 얼마나, 어떻게 힘든지 이야기하다가 한 명이 울면 같이 따라울고…항상 그랬어. 이런 걸 보면서 ‘정말 다들 힘들구나’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
밥을 먹으면서 다양한 고민을 나누는 ‘스여일삶’의 오프라인 모임. ‘스여일삶’ 제공
#2. 우리에게 더 많은 여성 동료가 필요한 이유
“(스타트업은 규모가 작다 보니) 1명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까 출산휴가 쓰겠다고 말하는 것도 미안하다”, “결혼·임신·출산에 관련된 복지 규정이 아예 없다”, “회사에 여성 선배가 없다 보니 일은 좋은데 3년 뒤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스타트업 업계 여성들의 고민은 김씨와 비슷했다. ‘내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사실 스타트업 같은 곳은 뭔가 젊고 유연하고 수평적인 문화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도 있는데.지영 물론 여성들이 조금 더 유연한 환경에서 일을 하기엔 스타트업이나 창업이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해. 하지만 아무래도 여성의 수가 적다보니 어려운 점들이 있어. 팀원 10명 중에 1명이 여자라면, 몸이 아파도 ‘여성이라 힘든가 보다’란 소리를 들을까봐 더 강하게 버티려고 해. 그러다 정작 본인이 지쳐서 힘들어하고. (여성으로서) 커리어 개발에 대한 고민이 있는데도 마땅히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분도 있었고. 여성 선배가 거의 없으니 ‘이렇게 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다’며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공통적으로 하더라고. 조직문화가 좋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기혼 여성인 경우 일과 육아의 균형을 맞추는게 힘들다보니 그 타협점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대표나 주위 사람들을 설득하는 걸 힘들어하기도 해. 많은 여성이 “내가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를 많이 하는 것 같아.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본투글로벌센터가 펴낸 <2018 대한민국 글로벌 창업백서>를 보면, 스타트업 여성 창업가 비중이 2016년 8.5%인데 2018년엔 6.1%로 오히려 떨어졌다. 100명 중 6명꼴이다. 여성을 한 명이라도 고용한 스타트업은 66.3%다. 김씨는 “20년 가까이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팅(지원·투자)을 해 온 멘토 분께 성비불균형 문제를 지적하며 ‘유능한 여성인재들이 이 업계에서 오래 일을 하려면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냐’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고 했다. 돌아온 답은 “그런 이슈에 대해 말을 하는 게 네가 처음이다”였다. 3년 전엔 강남 테헤란로에 어린이집을 만들어달란 이야기도 했다. 여성 뿐만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남성에게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엔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여성의 수가 적다는게 악순환을 부르는 것 같아. 모든 여성들이 ‘내가 실패하면 안 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고, 사람이 늘, 항상 잘할 수 있는 건 아닌데 조금만 삐끗해도 ‘여성은 역시 안 돼’란 편견에 부닥치고…그걸 피하려다가 결국 여성 자신이 소진되고. 지영 맞아. 여성 모두가 그런 점을 힘들어하더라고. 이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결국엔 가까운 곳에 나와 비슷한 연차거나 아니면 나보다 먼저 간 선배들을 알아두는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내가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된다’거나 ‘내가 이 회사에서 퇴사한다고 해서 나의 커리어가 완전히 끝난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려면 결국 다른 회사에서 다양하게 일하는 여성의 모습들을 보면서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게 ‘스여일삶’과 같은 커뮤니티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인 것 같고.
예를 들어 20대 후반 여성들한테 30대 초반 여성 선배들이 “나도 이렇게 했어”라거나 “나처럼 이렇게 할 수 있어”, “나랑은 조금 다르지만 이렇게 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해줄 수 있는 것, 내가 힘들 때 “만약 그 언니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떠올려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람이 내 눈앞에 있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계속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커뮤니티를 통해 다양한 연차와 나이대의 사람이 모여 서로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게 여성들에게는 특히 더 필요하고.
김씨는 ‘스여일삶’을 통해 미혼·비혼·기혼·졸혼·이혼 여부와 관계 없이 더 많은, 더 다양한 여성들이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특히 정기적으로 점심 모임을 이어가는 건 퇴근하고 집으로 달려가야하는 기혼·유자녀 여성을 위해 만든 자리기도 하다. “스타트업 업계의 네트워킹 행사나 이벤트가 대부분 저녁에 있다보니 기혼·유자녀 여성은 자연스럽게 더 나은 비즈니스 기회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여일삶’에서의 만남을 통해 이직을 하거나 협업을 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페이스북 커뮤니티 리더십 프로그램’에서 만난 전 세계의 여성 커뮤니티 리더들. 10명 중 7명이 여성 리더였다고 김지영씨는 말했다.
#3. 더 많은 여성 리더들과 함께
지난해 ‘페이스북 커뮤니티 리더십 프로그램’에 ‘스여일삶’이 뽑힌 건 김씨가 전업으로 커뮤니티 운영을 하도록 만드는 전환점이 됐다. 페이스북 본사가 의미있는 커뮤니티를 뽑아 지원하는 이 프로그램은, 지원 대상으로 선정될 경우 1년 동안 커뮤니티 운영을 위한 실무교육과 5만달러(약 5880만원)의 자금을 제공한다. 전세계에서 6000개가 넘는 커뮤니티가 지원을 신청했고, 그 가운데 115개 커뮤니티가 뽑혔다. 지난해 10월 김씨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페이스북 본사에서 리더십 교육을 받고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를 만나는 기회도 얻었다.
―페이스북 본사에 다녀온 경험은 어땠어? 프로그램을 특별히 지원한 이유가 있어?지영 사실 지난해 5월 ‘페이스북 코리아’에서 주최한 ‘커뮤니티 커넥트’라는 행사가 있었어. 한국의 여러 커뮤니티 운영자들을 모아서 대담을 하는 행사였는데, 그 때 나도 발표자로 초대가 됐었거든. 만들어진 지 오래 된 커뮤니티도 아니고 그 때는 멤버도 700명 정도 뿐이여서 내가 발표하는게 다른 운영자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부담이 됐어. 그 때 아빠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 “너가 700명을 대표하든, 7000명을 대표하든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스타트업의 여성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그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한 번 더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게 중요하다”고. 그래서 나갔고, 그 자리에서 ‘페이스북 커뮤니티 리더십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서 지원을 했어. ‘설마 진짜 될까’하는 마음이긴 했지만ㅎㅎ
―다른 커뮤니티 운영자들을 만났을 때 가장 기억에 남은 부분이 있어?지영 응, 그 프로그램에 선정된 100개 커뮤니티 운영자들이 지난해 10월 페이스북 본사에서 다같이 모였는데 인상깊었던 건 모인 운영자들의 70%가 여성이었다는 거야. 인도는 문화적인 이유로 여성이 얼굴을 드러내고 페이스북을 하는 일이 드물대. 그럼에도불구하고 경력을 이어가고 싶거나 본인의 비즈니스를 할 수 있도록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활동하는 여성도 있었고, 싱글맘 등 다양한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들이 많았어. 페이스북도 중요한 화두로 여성, 가족, 다음 세대에 대한 이슈들을 갖고 가고 싶었던 것 아닐까 생각했어. 샌드버그가 와서 “느슨한 연대를 통해 새로운 기회와 아이디어,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커뮤니티 리더들이 의미있는 활동을 한다고 생각한다”며 격려해주기도 했고.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와 ‘셀피’를 찰칵!
#4. ‘89년생 김지영’이 ‘17년생 김지영’에게
‘김지영’은 ‘김지영’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까. “<82년생 김지영> 책장을 덮고 30분 동안 울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미안하고, 버겁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여성’이란 이유로 주어지는 불평등에 무감해지고 타협해 온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2017년 그가 책을 읽고 남긴 글은 이렇다. “17년생 김지영이라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아닌 것 같다. 89년생 김지영이 싸우지 못한 탓에, 17년생 김지영에게 미안해서 울었고, 미안해야만 하는 현실이 억울해서 울었다. 첫째 딸, 맏며느리, 와이프 김지영으로서의 삶이 버거워서 울고 앞으로 새롭게 생길 ‘엄마’ 김지영의 삶 또한 무서워서 울었다.”
―<82년생 김지영> 책 읽어봤냐는 이야기 많이 들었을 것 같아ㅎㅎ지영 실제로 그 책을 읽고 ‘브런치’에다가 ‘89년생 김지영’으로서 느낀 이야기를 후기를 써서 올리기도 했어. 당연히 공감하는 바가 정말 많았지. 나는 사실 김지영이란 이름을 어렸을 땐 되게 안 좋아했거든. 너무 흔해서ㅎㅎ 그런데 그 책을 읽은 이후로 다양한 ‘지영이’ 중에 한 명으로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 나도 어렸을 땐 많이 싸웠는데 20대 이후로는 싸우지도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되게 슬프더라고. ‘좋은 게 좋은거지’라고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타협했던 것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고.
―‘89년생 김지영’의 페미니스트 모멘트는 언제야?지영 초등학교 입학한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 그 땐 꼭 ‘반장은 남자, 부반장은 여자’란 분위기였거든. “왜 여자라고 반장을 하면 안 돼?”라고 생각한게 시발점이었던 것 같아. 당시에 친구들을 열심히 설득해서 기어코 반장을 했어. 그런데 대학에 와서 학생회에 들어가보니 모든 일이 ‘예비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야. ‘예비역 오빠’들을 위해 여학생들이 도시락을 싸주기도 하고.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배척하는 분위기나 문화가 너무 힘들더라고. 그런 문화에 대해 “왜 이렇지? 왜 이렇게 해야되지?”란 생각을 꾸준히 해왔어.
김씨가 ‘스여일삶’을 통해 이루고 싶은 가장 중요한 목표는 스타트업 여성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스타트업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감상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은 ‘89년생 김지영’이 될 수 있을까.”
‘스여일삶’은 ‘89년생 김지영’이 세상의 많은 ‘김지영’들을 위해 다시 싸우기 위한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지독하게 흔해서 싫었다던 이름이,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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