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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9 16:15 수정 : 2019.08.09 16:21

[판을 바꾸는 언니들⑨]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 ‘믿는페미’

‘88올림픽’이 끝나고 태어났다. 스무살이 되던 해, 실력만 있으면 유리천장쯤은 부술 수 있다는 ‘알파걸’이 등장했다. 서른이 되자 직장에선 자책감을, 가정에선 죄책감을 느끼는 ‘슈퍼우먼’ 선배들이 보였다. 여성의 생존과 성공에 대한 서사는 늘었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판의 기울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 판 자체에 균열을 내는 방법은 없을까. ‘알파걸’도 ‘슈퍼우먼’도 주지 못한 답을 찾고 싶어, 또래 여성들을 만나러 나섰다.

‘믿는페미’ 활동가 ‘달밤’(왼쪽)과 ‘새말’. 사진 황금비 기자

“먼지처럼 달려드는 세상의 어리석음과 뜻모를 미움에는 강하고 담대하게 하소서. 미움과 차별과 배제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니, 오직 당당하게, 하나님의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을 지켜내고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사랑을 나누게 하소서.”

‘믿는페미’를 처음 만난 건 지난 5월 31일이다. 이날 서울시청광장 한쪽에선 작은 축복식이 마련됐다.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 전야제로 열린 ‘핑크닷페스티벌’ 현장이었다. 성소수자와 앨라이(ally·지지자)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함께 기도하고 축복하는 자리였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여성, 약자와 더불어 우리의 존재를 축복하며 차별과 혐오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서로 마주보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마주보는 축복식’의 핵심이다. 교회 안에서 배척돼왔던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껴안는 것,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을 해 나가는 ‘믿는페미’의 활동 이유이자 목표기도 하다. 사랑보다 혐오의 이름으로 더 많이 호명되곤 하는 기독교 안에서, 이들은 어떻게 페미니즘 운동을 해 나가는 걸까. 지난달 8일 ‘믿는페미’ 활동가 달밤(35), 새말(26)과 <한겨레> 본사에서 만났다.

#1. 떠나지 못한다면 바꿔볼래

‘믿는페미’는 2017년 3월 탄생했다. “가부장적인 교회문화와 성경 해석을 바꾸고 싶다”는 바람 아래 세명의 활동가(달밤·더께더께·오스칼네고양이, 새말은 이후에 합류)가 모였다. 기독여민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와이더블유시에이(YWCA)를 중심으로 이어져 온 여성운동을 바탕으로 하되, ‘2016년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이후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었다. “선배들이 운동했던 유산을 이어받으면서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30 여성신자들의 목소리를 날 것 그대로 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달밤은 말했다. ‘믿는페미’는 팟캐스트 <믿는페미:교회를 부탁해>와 웹진 <날것>을 통해 교회 안의 여성혐오와 성차별적인 문화를 이야기하는 장을 만들고 있다. 낙태죄 폐지, 성소수자 혐오, 교회 내 성폭력 등에 목소리를 내며 강연회나 예배를 연다.

―안녕! ‘믿는페미’가 어떤 판을 바꿔가고 있다고 생각해?

새말 사실 “우리가 과연 판을 바꿀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 판을 지금 많이 바꿨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아. 다만 바꿔나가고 있고 “앞으로 바꿀 것이다. 언젠가 그날은 오리라”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것 같아ㅎㅎ 기독교 안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아직 작게 들리지만, 만약에 판을 바꾼다면 기존의 가부장적인 교회 문화와 성서해석을 바꾸고 싶어.

달밤 여러 개의 목소리가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어. 교회 안에서 보통 여성은 ‘침묵하는 존재’이자 ‘순종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사명에 반기를 든다는 건 ‘이기적이고 불손한 사람’이 되는 거거든. 여성들은 그럼 침묵하거나, 적응해버리거나, 뛰쳐나오게 되는데 그러면 교회 안에서 결국 하나의 목소리만 남게 되는 거야. 살아남는 건 굉장히 가부장적인 목소리 뿐이야.

―사실 제일 궁금한 건 이거야. 많은 한국 교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되려 앞세워 성소수자를 차별하잖아. 새말은 목사님으로부터 “페미니즘은 동성애와 마찬가지로 죄악”이라는 말을 들어봤다고도 했고. 그런데 어떻게 신자인 동시에 페미니스트로서 정체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어?

달밤 교회를 떠난다고 해도 내가 ‘기독교인’이란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신앙을 갖고 있는 한 교회를 떠난다고 해서 신앙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이미 30년 이상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으니 내 안에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가장 중요하게 자리잡기도 했고. 또 교회가 가부장적이라서 뛰쳐나간다고 해도 “가부장적이지 않은 안전지대가 있나?” 싶기도 해. 한국사회가 지금 그걸 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내가 믿는 동료들과 함께 따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페미니즘을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거지. 사실 교회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앙을 저버리게 하는 역할을 하잖아. 신앙을 갈취하는 면도 있고. 평등하고 차별적이지 않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교회에 되돌려놓겠다는 운동을 내가 여기서 버티며 쫓겨나거나 도망치지 않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실제로 ‘탈기독교’나 ‘탈교회’했다는 분들이 “‘믿는페미’ 나타나서 되게 반갑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어ㅎㅎ

새말 내가 추구하거나 꿈꾸는 신앙의 모습과 페미니즘의 방향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 천국을 말할 때 성경에서 어린 양과 이리가 같이 뛰논다는 표현을 쓴단 말이야. 어떤 존재를 차별하거나 배제해선 안 된다는 것, 우리는 모두 평등하고 함께 살아가야할 존재라는 걸 인정한다는 지점에서 신앙과 페미니즘이 만난다고 생각해.

달밤 되게 가부장적인 하나님을 (교회에서) 소개해주고 그런 신학을 알려주면서 “못 버티겠으면 페미니스트들이 교회 나가” 이런단 말이야. 그럼 우리 입장에선 “내가 왜 나가. 너희가 나가!” 이런 거지ㅎㅎ 하나님은 원래 우열을 비교하며 어떤 존재는 섬겨야 하고 또 다른 존재는 억압하거나 차별받아야 한다고 하시지 않는단 말이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를 항상 하는데 그 ‘당신’ 안에 남자만 있겠냐는 거지. 여성도 있고, 젠더퀴어도 있고, 장애인도 있고. 우리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니까, 너무 당연하게 페미니즘과 맞는 것 같아.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3주기를 추모하며 올해 5월 16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짓는 예배’ 모습. 믿는페미 제공

#2. 안전한 교회, 평등한 예배를 위해

‘믿는페미’는 남성 목사와 장로 중심으로 위계적으로 진행되는 예배 관습을 바꿀 수 있도록 상상력의 물꼬를 틔운다.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이 한 땀 한 땀 지어나간다’는 의미의 ‘짓는 예배’를 꾸리는 것이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1주기 때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처음 진행된 ‘짓는 예배’에선 설교자, 성찬 집례자가 모두 여성이었다. 설교 또한 성경을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전달하고 교회 성폭력 근절과 피해자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함께 드리는 등 ‘성차별로부터 안전한 예배’를 지향한다. 달밤은 “아직도 여성 목사의 안수 자체가 안 되는 교단이 있다 보니 여성이 성찬을 집례하는 경험이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하는 분도 있다”며 “여성 목사들이 자꾸 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교회 안에서 겪는 성차별이나 반페미니즘적인 면은 어떤 거야? 교인으로서 실질적으로 부딪치면서 불편했던 경험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해.

새말 일단 성경 해석 자체가 그래. 성경도 수천년 전에 쓰인거다 보니 당연히 여성혐오적이고 차별적인 문화가 담겨있어. 결국 목사가 (성경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질 수 있는데 그 당시 사고방식 그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예를 들면, 주례사로 많이 쓰이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이 대표적이야. 바울이 쓴 서신에 나오는 건데 결국 (내용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존중하라’는 뜻이거든. 그런데 문자 그대로만 해석을 해버리는 경우가 있어. 성경 안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의 존재를 발굴하고 행간을 찾아내고 상상해보는 연습을 하기도 해. ‘백인 남성’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신을 어떤 영화에서처럼 ‘흑인 여성’으로 상상해본다든가 하는 노력도 하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한정해 구분하는 교회의 문화를 바꿔보기도 한다. 달밤은 “사모님”으로 불릴 때가 있다. 배우자가 목사기 때문이다. 목사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배우자가 ‘사모님’이라고 불리지만 그는 “사실상 한 교회의 며느리 역할을 해야한다는 의미”라고도 설명했다.

―‘사모님’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거야?

달밤 피아노 반주를 하거나 교인들의 식사 준비를 하는 등 ‘교회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 목회자 아내가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는 교회도 있어. 일을 할 시간에 성경 공부를 하고, 목회자를 잘 보조하고, 사역을 해야 하는 거지. 교인들이 언제 찾아오든 음식을 대접하고 보살펴야 하고. 이런 문화를 바꿔보려고 “전통적으로 ‘사모’에게 강조돼왔던 역할을 계속 수행하는 건 교인들에게 (잘못된) 교육효과를 낳을 수 있으니 일정 부분은 하지 않겠다”고 (배우자와) 합의도 했어. 교회에선 목사가 직접 기타로 찬송가를 연주하고 식사를 준비하기도 해. 주기적으로 평신도 설교를 하는 자리도 만들었어. 그래도 어려움은 아직 많아. 호칭의 문제를 바꾸고 싶어서 서로 별명으로 부르자는 제안도 했는데 교회 안에서 그런 문화가 정착돼있는 게 아니라 서로 불편해하더라고ㅎㅎ

새말 여성신자들은 주방봉사나 설거지를 하는 등 주방에 머물러 있고 남성은 목사를 하거나 장로님이 되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기구에 소속돼 있는 경우가 많아. 성역할 고정관념이 많이 있는 거지.

교회는 성폭력 통념이 재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미투 운동’이 시작되기에 앞서, 2017년 교계에선 ‘#교회_내_성폭력_OUT’ 운동이 일어났다. ‘청소년 전문 강사’로 알려져 해있던 목사의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이 드러나면서다. ‘믿는페미’ 역시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팟캐스트를 통해 교회 안의 성폭력 사례를 제보를 받아 고발하기도 한다. 여름 수련회에서 “여자애들이 요즘 너무 짧게 입고 다니는데, 그러면 안 되지만 목사님은 고맙다”라고 말한 목사의 이야기나 신학생의 데이트폭력·성폭력 이야기가 팟캐스트를 통해 소개됐다.

5월 31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핑크닷페스티벌’ 한쪽 부스에 믿는페미가 마련한 ‘마주보는 축복식’ 장소. 믿는페미 제공

#3. 이건 다 <페미니즘의 도전> 때문이야

달밤의 페미니스트 모멘트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왔다. ‘공부도 잘하고 착한’ 오빠 아래에서 ‘사납고 뛰어노는 거 좋아하는’ 딸로 살았다. 엄마가 없는 날이면 “오빠 밥상 좀 차려줘라”라는 말에 바득바득 대들기도 했다. 여중·여고를 다닐 땐 몰랐는데 남녀공학인 대학교를 가니 비로소 “나는 그냥 ‘사람’이나 ‘학생’이 아닌 여자구나”라는 걸 느꼈다.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고, 여성의 목소리는 남성에 기댈 때에야 들렸다. 고민을 할 때 선배가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건넸다.

새말의 페미니스트 모멘트는 2015년 ‘메갈리아’의 탄생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며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는 신학의 가능성을 고민해왔지만, 페미니즘은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메르스갤러리’나 ‘메갈리아’에서 여성혐오적인 표현을 뒤집어 보여주는 ‘미러링’ 표현을 사용하는 걸 보면서도 처음엔 “인터넷 유행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자꾸 커졌다. “뭔가가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는 그는 그 해 여름 <페미니즘의 도전> 책을 샀다. 책을 읽으며 “나도 페미니스트구나”란 정체성을 찾았다.

―페미니스트로서 살면서 느끼는 희노애락 같은게 있다면 어떤 거야?

새말 조금 더 자유로워진 것 같아.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까’에 대해 이전보다는 많이 자유로워졌어. 내가 스스로 나를 통제하려는 점이 좀 사라진 것 같아. 그게 요즘 ‘탈코르셋’ 운동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고ㅎㅎ 페미니즘을 몰랐을 땐 어떤 공동체에서 성차별을 겪어도 그게 왜 불편한지 잘 몰랐는데 이제 그런 지점이 설명이 되고. 언어를 가지게 된 것 같아. 페미니스트 동료들을 만나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다는 점도 좋고ㅎㅎ

달밤 힘들고 우울할 때는 너무너무 느리게 변할 때? 하나의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때도 (우리가) 쏟는 에너지에 견줘 상대는 너무 강하고 권력을 갖고 있더라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든, 그를 지원하는 사람이든 지치고 상처입고 분열하거나 원망하기도 하고. 어느 것 하나 속시원하게 해결되지 않거나 심지어 퇴보하는 모습을 볼 땐 절망적이야. “내가 죽기 전에 뭐라도 하나 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어. 그래도 기운을 얻는 이유는 이런 판에서도 30년 전부터 어떻게든 운동해서 뭔가 하나 법적인 장치라도 만들어 둔 선배들이 있으니까. 길게 보면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싸워왔던 사람들 때문에 뭔가 계속 바뀌어가고는 있잖아. 이 운동을 시작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진짜로 용기가 되는 순간이 있어서 위로도 돼ㅎㅎ그게 가장 행복한 지점인 것 같아.

새말 달밤이 말한 것처럼 변화가 더딜 땐 힘들지. “되게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바뀌는 거 하나 없구나”란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만큼 작은 것 바꾸기 위해 굉장히 오래 투쟁해왔던 역사가 소중하고, 그걸 기억해야겠다고도 다짐해. 나와 우리의 활동을 많이 기록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

‘믿는페미’는 올해 2월 책 <배틀그라운드> 저자와 함께 낙태죄 문제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북토크와 영화 공동체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믿는페미 제공

#4. “기독교인이지만 섹스는 하고 싶어”

“‘기독교인이지만 섹스는 하고 싶어’가 주제랄까?ㅎㅎ” (새말)

“어? ‘교회가 알려주지 않는 섹스이야기’보다 그게 더 좋은데? 그걸로 할까?” (달밤)

빵 터진 웃음이 한바탕 자리를 휩쓸었다. 즉석에서 강연 이름이 바뀌었다. ‘믿는페미’는 오는 10월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기독교인이지만 섹스는 하고 싶어’란 강연을 연다. 주로 여성 신자들에게 강요되는 ‘혼전순결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상대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는 취지다. 이들은 “여성을 재산으로 여기던, 가부장적인 고대 문화의 맥락과 합쳐진” 혼전순결 이데올로기가 남성을 위해 여성의 성을 도구화하고 되려 “사랑하는 사이에 안전하고 평등한 관계를 맺는 것”을 구속한다고 말한다.

―혼전순결이 기독교적인 방식이긴 해?

달밤 그런 얘기는 성경에 없어. ‘혼전순결’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가부장적인 맥락과 합쳐져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돼있는 거지ㅎㅎ “순결을 잘 지켜서 결혼할 때 배우자에게 내 순결을 선물로 준다. 배우자가 ‘신상’을 풀어볼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식이야. 여성과 아이들을 ‘재산’으로 여겨지던 고대의 문화가 반영이 된 거지. 신약성경에도 예수님이 오셔서 (사람 수를 셀 때) 여성이나 아이는 세지 않고 남성만 세고 하거든.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잖아. 가부장적인 맥락을 지금 2019년에 가져와서 교회 안에서 ‘여성의 혼전순결’을 강조해야 할까?

새말 “선물 포장이 돼 있는데 풀었다 덮었다 풀었다 덮었다 주면 어떡하겠느냐” 이런 비유도 들어봤어. ‘순결’이란 단어를 성경에서 사용하는 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신앙을 가졌다. 깨끗한 마음을 가졌다” 이런 의미야. 정결한 마음 또는 갈고 닦은 마음을 하나님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거지. 그걸 사람의 몸에 대입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해. 그것도 순전히 남성중심적인 삽입 섹스를 기준으로만 혼전순결을 말하고 있고. 이런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랑하는 사이에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는 이야기를 안 하게 되는 것 같아. 관계를 맺고 싶다면 상대의 동의를 얻어 안전하게 해야한다는 것 자체를 가리고 “섹스하면 안 돼”라고만 말을 하니까 안 보이는데서 억압적이고 비틀린 관계를 맺게 되는 것 같아.

달밤(왼쪽)과 새말은 모두 ‘모태신앙’이다. 가족이 모두 목회자기도 하다. 달밤은 배우자, 새말은 아버지가 목사다. 이들은 ‘믿는페미’ 활동을 통해 “동료를 만난 일”이 가장 행복하다고 꼽았다. 사진 황금비 기자

탄생 3년을 맞은 올해, ‘믿는페미’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았다. 현재 5명의 운영진(달밤, 도라희년, 새말, 오스칼네고양이, 폴짝)이 모두 본업과 별도로 시간, 노동력, 자비를 들여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지속가능한 운동’에 대한 고민이 생긴 것이다. 느슨한 연대체를 넘어 회원을 추가로 받거나 후원구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거대한 교계 안에서 “과연 판을 바꿀 수 있을까” 끊임없이 회의하면서도 이들은 “계속 잘못됐다고 이야기 할 것”이라고 말한다. “변화는 아래로부터 일어난다”고 믿기에 다시, 신앙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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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박다해 기자, 연출=황금비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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