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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7 10:03 수정 : 2019.09.24 17:21

[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⑤독일과 한국 여성운동 연대

1988년 독일의 여러 노동조합은 연대의 의미로 한국 여성노동자 투쟁 소식을 알리는 행사에 개최했다. 사진은 베를린의 한 노조가 만든 행사 포스터. 재독한국여성모임 제공.
1987년 8월15일, 독일 아들러 기업이 운영하는 9곳의 옷가게에서 동시다발로 화재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으며, 옷만 불에 타서 기업에 대한 재산 피해만 입힌 사건이었다. 이 방화사건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 미궁에 빠져 있을 때, 사건 사흘 뒤인 8월18일 독일 언론 <타츠>(TAZ)에 한 성명서가 실렸다.

“한국 아들러 기업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력 착취와 성폭력, 성차별 문제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다. 한국과 스리랑카에 지점을 둔 아들러 생산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과 생활환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그간 독일 아들러 백화점 앞 시위와 홍보 활동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다 … 아들러의 9개 지점은 우리에 의해 불길에 휩싸였다. 우리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타오르는 불길로 한국 여성 노동자에게 연대 인사를 보낸다.”

이들은 독일의 급진 페미니스트 게릴라 조직 ‘로테 초라’(Die Rote Zora)다. 당시 독일 아들러 기업이 운영한 한국 후레아 패션 공장 여성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고 있었다. 노조 결성이 금지되어 있어 낮은 임금과 부당 해고에 맞서 싸울 수 없었으며, 기업 직원들에 의한 성폭력과 성차별이 계속 이어졌다.

이 투쟁이 독일에 알려진 것은 파독간호사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간 주예회 선생의 편지를 통해서였다. 그는 파독간호사로 이뤄진 ‘재독한국여성모임’에 연대 투쟁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모임 회원들은 아들러 본사에 강력한 항의 서한을 보냈다. 동시에 후레아 패션 노동자 투쟁 소식을 독일어로 번역해 아들러 기업이 운영하는 매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불매운동과 동시에 독일 여러 단체 조직망을 활용해 연대 투쟁을 이어갔다.

별다른 진전이 없던 와중에 ‘로테 초라’의 공격이 발생했고, 후레아 패션 공장 노동자의 투쟁은 승리했다. 아들러 기업은 노동자의 요구대로 ‘임금 인상’ ‘해고노동자 복직’ ‘노조 결성 허용’ 등을 받아들였다.

로테 초라 심볼. 독일 ZECKO 매거진 제공.
‘로테 초라’에 대한 이 같은 자세한 이야기는 최근 독일에서 상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여성들이 갱 조직을 만든다>(Frauen bildet Banden)를 통해 접했다. 70~80년대 독일의 주요 여성운동 이슈와 ‘로테 초라’에 대해 다룬 이 다큐는 당시 활동했던 여성들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여전히 누군지 알려지지 않은 ‘로테 초라’ 조직원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고, 안차조 재독한국여성모임 대표의 인터뷰도 있다. 그는 “아들러 기업에 대항한 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1976년부터 모임 회원들이 한국 여성 노동자와 연대해온 경험이 토대가 되었다”며 “긴 역사를 지닌 한국과 독일 간 여성 연대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70대, 80대가 된 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들은 지금도 적극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모임 창립 멤버였던 최영숙 한민족유럽연대 의장은 독일 ‘연대하는 사회를 위한 재분배재단’ 여성분과위원회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 중이다. 안차조 대표도 독일 영페미니스트들이 주최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조국남 전 대표는 전세계에서 온 멤버들이 활동하는 독일이주여성단체 ‘다미그라’(DaMigra)를 이끌고 있다.

이분들을 보며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용기와 확신을 얻었다. 오늘따라 사무실 한편에 쓰여 있는 문구가 더욱 와닿는다. “우리의 단결은 우리의 강점이다. 어떤 여성도 혼자가 아니다!”(Our unity is our strength. No woman is alone!)

채혜원: <여성신문> <우먼타임스> 등에서 취재기자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와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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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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