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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2 18:57 수정 : 2019.09.24 02:32

[짬] 세계 여성평화운동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

‘2019 DMZ포럼’ 참석을 위해 방한한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20일 오전 서울 종로의 한 호텔에서 한국의 최근 여성운동 흐름과 현상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그는 광화문 광장에서 춤을 췄다. 다른 여성들의 손을 잡고 원을 만들었다. 광장의 소음 한가운데서도 느리지만 평온한 몸짓을 이어갔다. 평화를 기원하는 움직임이었다. 지난 20일 미국대사관 앞에서 남북 평화와 종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막 끝낸 참이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 이 여든다섯살의 여성은 이날도 길에서 여성의 권리를, 여성이 만들어가는 평화의 중요성을 말했다. 2002년 첫 방문 때나 2011년 때와 꼭같이, 이번에도 선글라스에 가죽 라이더 재킷, 검은 바지를 입은 채였다.

9·19남북공동선언 기념으로 경기도가 주최한 ‘2019 디엠제트(DMZ)포럼’의 기조연설자로 초청받아 4년 만에 다시 방한한 그는 세계적인 여성운동가이자 언론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이날 오후 서울 수송동의 한 호텔에서 그를 따로 만났다.

‘2019 디엠제트포럼’ 기조연설 이어
20일 미대사관 앞 ‘한반도 종전’ 회견
2015년 이어 ‘한겨레’와 단독 인터뷰

“미투·탈코르셋…한국 변화 고무적”
“성평등 사회 ‘불가능한 꿈’ 아니다”
“역차별 주장에 앞서 남성도 분발해야”

“매우 훌륭하고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죠.”

디지털 성범죄 공론화, 낙태죄 폐지, ‘미투’ 운동부터 ‘탈코르셋’(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성에 저항하는 일) 운동까지, 2015년 이후 한국사회의 고정관념을 뒤집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활약상에 대한 그의 첫 반응이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이라고 덧붙인 그는 “저같은 사람이 앞으로 더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웃었다. 마침 그는 이날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연합회 강당에서 한국의 영페미니스트들과 만남을 앞두고 있었다.

성평등은 곧 민주주의의 문제다. 스타이넘은 “여성은 완전한 민주주의 안에서 살아오지 못했다. 여성이 자신의 몸이나 발언을 스스로 지배할 권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사회적으로 커진 여성의 목소리가 정치, 경제 등 제도권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것 역시 “민주주의의 부족”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평등할 때 가능한 거잖아요.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위해선 먼저 남성도 여성만큼 육아에 참여를 해야죠. 여성이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직장을 갖게 된 것처럼 남성은 집으로 돌아와 자녀를 키우면서 인내나 공감력을 키울 수 있어야 해요. 이건 ‘여성의 자질’ 아니라 ‘인간’으로서 기본 자질이잖아요. 남성도 ‘완전체’가 되기 위해선 이런 노력이 필요하죠.”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20일 오전 서울 종로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그는 이런 모습이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라고 했다. 가부장제가 확립되기 이전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유목사회에선 남성이 집에서 자녀를 돌보고 가사분담을 해왔죠. 미국만 해도 유럽의 가부장주의자들이 상륙하기 전 원주민들의 사회는 모성 중심이었어요. 한국의 역사를 잘 모르지만 제주도도 그렇지 않나요? 모계 중심이었다고 알고 있지요.”

최근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 남성들의 ‘역차별’ 주장도 거세지고 있다고 하자 그는 “(남성이) 우위에 있고,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같은 조건에서 여성이 더 좋은 시험 성적이나 성과를 낸다는 건 각자의 능력에 따른 거지 차별이나 역차별 문제가 아니잖아요. 남성이 더 분발해야 한다는 뜻이죠. 이런 반발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결국 여성들 각자의 지혜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정답을 드릴 위치는 아니고요.”

그는 젠더나 인종이란 개념 모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강조했다. 최근의 급진 페미니즘 물결 안에서 성소수자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우리 모두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그는 단호히 말했다. “저는 두 개의 정체성만 가지고 사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하나는 ‘나의 정체성’ 또 하나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죠.”

‘변화가 더딜 때 지친 적은 없었냐’고 물었다. “그게 바로 운동이 필요한 이유”라고 그는 답했다. 전 세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기록하며 평생을 살아온 그는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말했다. 그는 이들을 “희망과 가치를 공유하는 일종의 ‘선택된 가족’과 같다”고 했다. “혼자서는 변화가 불가능하다.” 여성은 “위계(rank)가 아닌 연계(link)가 중요하다”는, 그가 늘 강조해 온 메시지와 같은 맥락이었다.

‘나이를 잘 드는 법’도 궁금했다. 그는 “출산 가능성 때문에 여성의 노화는 더 많은 차별을 받아왔다”고 짚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하지만 우리는 자궁 뿐만 아니라 뇌도 갖고 있잖아요? 젊은 여성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시스템을 거부해야죠.”

‘내 마지막 소망은 말 그대로 길을 여는 것이다. 지금까지 길은 압도적으로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남자들은 모험을 상징하고 여자들은 아궁이와 가정을 상징하는 식이었다.’(회고록 <길 위의 인생> 중에서)

“지금까지 삶을 지탱해 온 신념이 있냐”는 질문에 스타이넘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모험이죠.” 그다운 답변이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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