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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4 04:59 수정 : 2019.09.24 10:49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가 속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회원들이 지난 1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간강죄 구성요건을 '폭행, 협박'에서 '동의'여부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강간죄 패러다임을 바꾸자]
‘폭행·협박’ 구성요건으로 삼는
형법 297조 ‘강간죄’

취약한 상황, 호의 악용하거나
피해자 ‘만취 블랙아웃’ 때조차
가해자에게 유죄 적용 어려워
처벌 사각·공백지대 생겨

유엔·국제형사재판소·유럽 등도
‘비동의 간음죄’ 권고하거나 도입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가 속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회원들이 지난 1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간강죄 구성요건을 '폭행, 협박'에서 '동의'여부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가해자들은 집요했지만, 법원은 성폭력이 아니라고 했다. 피해자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인턴이 종료될 즈음 회사 쪽으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았고, 상사의 회식 참석 권유와 2·3차 강요 및 집요한 추행이 있었다. 애써 뿌리치며 귀가하려는데 택시로 데려다주겠다며 동승했고, 집 앞에 내리면 집에 따라올까 봐 근처에서 내렸더니 집에 함께 가자고 조르고, 술을 더 먹자고 강권했다. 사람들 많은 곳에 있으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편의점 앞에서 술을 먹으면 덜 위험하다고 판단했는데 그 이후 기억이 없고 눈을 떠보니 모텔에서 강간 피해를 당한 후였다.”(A성폭력상담소, 2018년, ㄱ씨 상담사례)

“가해자는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으로 함께 술을 먹고 데려다준다고 해서 이를 호의로 받아들였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오피스텔 건물 현관까지 같이 들어와서 물만 한잔 먹고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집 안까지 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거절하였으나, 거듭 물만 한잔 마시겠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들어오게 해서 물을 따라주었는데 그러자마자 침대 쪽으로 밀치고 강간했다.”(B성폭력상담소, 2018년, ㄴ씨 상담사례)

여성가족부의 연구용역 의뢰를 받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12월 펴낸 연구보고서 ‘성폭력 피해 상담 분석 및 피해자 지원방안 연구’에 담긴 성폭력 상담 사례다. 이처럼 성폭력 가해자들은 끈질겼다. 피해자의 취약한 위치나 상황, 인간적인 신뢰나 호의를 이용했다. “물만 마시겠다”며 속이고 “하지 말라”는 요구는 묵살했다.

이들은 원치 않는 성폭력을 겪었지만, 현행 형법에 따르면 이런 사례는 강간죄를 인정받기 어렵다. 형법 297조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죄의 구성요건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1953년 형법이 처음 제정된 뒤 단 한번도 바뀌지 않은 요건이다. 법원은 이를 기반으로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력과 협박’(최협의설)을 기준으로 유죄 여부를 판단한다. 상담자 ㄷ씨는 “성폭력을 당할 때 저항을 해서 죽는 것보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지만, 현실에선 폭행과 협박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피해자의 “적극적 저항 여부”를 묻는다.

66년 전 만들어진 법조문은 현실의 성폭력을 포괄하지 못한다. 처벌의 공백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기존의) 폭행·협박 규정이 사람들의 변화된 인식 수준을 포섭하지 못하고 있어서 판례 간 괴리와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법이 피해자의 저항 행위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의 없이 하는 행위’가 ‘성폭력’이란 패러다임을 안착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피해자가 음주·약물·수면 상태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이 대표적인 사각지대로 꼽힌다. 피해자가 신체적인 방어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거부 의사를 표현하더라도 실제 범죄의 발생을 저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상담자 ㄹ씨는 “아르바이트 회식 자리에서 만취했는데 가해자가 집으로 데려다준 뒤 강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을 기준으로 하는 현행 준강간죄 판결은 음주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사리판단 능력이 제한되는 상태’를 유죄 판단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 실제로 서울고등법원은 2015년 일시적인 “블랙아웃 증상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성관계에 동의한 적이 없는 이런 사례는 ‘성폭력으로 인식하지만 법적으론 범죄가 아닌’ 사각지대에서 방치돼왔다. ‘비동의 간음죄’의 도입이 이런 공백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이유다. 수사부터 신문 과정까지 ‘피해자의 저항 여부’에만 초점을 맞추며 2차 피해를 양산하는 관행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반성폭력활동가 ‘마녀’는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는 과정에서 만난 상당수 여성들은 자신들의 의사에 반한 성관계 모두를 강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법적 절차는 경찰·검찰의 수사 단계부터 ‘최협의설’에 입각해 이뤄지는 실정”이라며 “신문 과정에서 피해자가 심한 모욕감, 수치심 등을 호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증인 신문 후 피해자가 자살 및 자해, 불안, 우울증상이 높아지는 사례도 많다”고 밝혔다.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라는 유엔의 권고도 계속되고 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7년 “성범죄는 ‘자유로운 동의의 부재’를 기준으로 정의돼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해에는 한국 정부에 직접 형법 제297조를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개정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국제형사재판소 역시 ‘동의의 부재’를 강간 성립 여부 판단의 주안점으로 두고 있고, 유럽인권재판소는 “유럽인권협약에 의해 국가는 피해자의 동의 없이 이뤄진 모든 성적 행위를 기소하고 처벌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세계적인 추세도 바뀌고 있다. 영국(2003년), 스웨덴(2018년), 독일(2016년)은 동의 여부나 자발적 참여 등을 기준으로 강간죄를 규정하는 방향으로 형법을 개정했고, 2011년 유럽 34개국이 비준, 46개국이 서명한 ‘이스탄불 협약’은 “동의 없는 모든 성적 행위는 범죄화돼야 한다”고 규정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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