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바꾸는 언니들⑫]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FDSC)
‘88올림픽’이 끝나고 태어났다. 스무살이 되던 해, 실력만 있으면 유리천장쯤은 부술 수 있다는 ‘알파걸’이 등장했다. 서른이 되자 직장에선 자책감을, 가정에선 죄책감을 느끼는 ‘슈퍼우먼’ 선배들이 보였다. 여성의 생존과 성공에 대한 서사는 늘었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판의 기울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 판 자체에 균열을 내는 방법은 없을까. ‘알파걸’도 ‘슈퍼우먼’도 주지 못한 답을 찾고 싶어, 또래 여성들을 만나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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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FDSC) 소속 디자이너 (왼쪽부터 한경희, 김소미, 김수영)들이 지난 1일 오후 한겨레 신문사에서 대화하고 있다. FDSC 활동을 통해 처음 만난 이들은 함께 ‘디자인FM’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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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판에는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그래픽 디자이너 120여명이 모인 온·오프라인 커뮤니티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FDSC)은 업계의 낡은 관행과 게으른 관성을 깨기 위해 어떤 규칙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만들고, 이를 실천한다. ‘페미니스트 그래픽 디자이너가 모여 정보를 나누고 오래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커뮤니티’인 이곳에서 만든 원칙은 현행 디자이너 업계의 문제를 정확히 포착해 이를 개선하기 위한 해결책이기도 하다. “야근, 격무, 회식이 당연시되는 문화는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배제함을 인지하고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공부하고 실천한다” “공짜로 일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직업과 기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 결과물에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법을 공부하고 실천한다”가 그 예다.
FDSC의 존재는 업계 안의 여성 디자이너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경희(30), 김소미(31), 김수영(28) 디자이너를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이들은 각각 7년차(경희, 소미) 5년차(수영) 디자이너다.
#1. 여성 디자이너끼리 서로 팁을 나누면 어떨까?
―안녕! FDSC는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해
소미 ‘오늘의 풍경’ 신인아 디자이너가 지난해 트위터에 “여성 디자이너끼리 서로 팁을 나누는 모임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글을 올렸어.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은 메시지를 달라”는 말에 메시지를 보냈고, 그렇게 처음 신인아, 김소미, 양민영, 우유니게 4명이 모였어. 같은 해 7월 설명회를 열고 취지에 공감하는 회원을 모집해 55명으로 시작했지. 지금은 회원이 120명 가량이야. 1년에 두 번 정도 설명회를 해서 회원을 모집하고 있어. 올해 8월부터는 월 3만원의 회비를 받는 유료 회원제로 바꿨고.
FDSC는
디자이너 업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원 가입 기회는 여성에게 우선 주어진다. FDSC 안에선 크고 작은 소모임과 프로젝트가 운영되는데 설립 취지에만 부합하면 누구나 모임을 기획하고 운영진으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궁금했던 디자이너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해 조언을 듣는 ‘스튜디오 어택’ 프로젝트, 디자이너의 활동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적정 단가 알아보기, 견적서 쓰기, 운동하기 소모임 등이 이뤄져왔다.
―반응이 가장 좋았던 소모임은 어떤거야?
소미 ‘견적서 쓰기’ 소모임이었어. 프리랜서나 1인 사업자처럼 회사 경험이 많지 않으면 견적서가 어떤 항목으로 구성되는지 잘 모를 수 있잖아. 각자 견적서를 가져와 공유하고 결과가 좋은 견적서와 망한 견적서를 비교해보니 실질적으로 도움이 됐지.
수영 단순히 인건비나 디자인비만 견적서에 명시하는게 아니고 시안 수정 횟수, 디자인 리서치 관련 비용 등으로 항목을 쪼개니까 일에 대한 근거가 명확하게 보여서 좋더라고. 내 일을 더 꼼꼼하게 볼 수 있고 일이 더 잘 되게끔 노력하게 되기도 하고.
―이건 좀 독특하다 싶은 소모임도 있어?
경희 운동 소모임도 열리고 있어. FDSC 1차 설명회 때 이예연 디자이너가 “뒤에 앉아서 여러분들을 보니 다 거북목이라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말해서 만들어진 거야ㅎㅎ 늘 앉아서 일하다 보니 자세가 안 좋을 수밖에 없잖아. 안그래도 허리랑 목이랑 안 좋아서 운동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소모임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같이 하고 있어. 지난 봄에는 운동회도 한 번 했는데 재밌었어ㅎㅎ 2인3각 달리기도 하고, 농구 자유투 게임도 하고, 박 터트리기, 계주도 하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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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FDSC가 개최한 운동회 모습. 강희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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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성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사라졌을까
FDSC의 문제의식은 많은 여성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여성 디자이너를 배제하는 디자인계의 구조와 문화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바꿔보자”고 이들은 말한다. FDSC만의 원칙도 이 문제의식에서 탄생했다.
―그 많던 여성 디자이너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란 질문을 ‘어떻게’로 바꿨다는 점이 인상깊었어. 그 답을 FDSC 활동을 하면서 찾았어?
수영 일을 하면서 ‘내가 이러다 사라질 수 있겠구나’라는 걸 느꼈거든. 디자인 일은 좋은데 격무에 박봉이고. 과연 내일, 내년이 어떻게 될까 생각했을 때 그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 거야. 업계 안에선
실제로 작업을 한 디자이너보다 대표나 회사 이름이 조명받는 경우가 많고,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다들 소진되고 사라지는 것 아닐까 생각도 들었어. 결혼하고 나서는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가는 친구들도 많이 없었고.
경희 미디어에서 호명하는 디자이너가 ‘신격화’되서 보여지는 부분도 이유 중 하나 같아. 사실 그렇게 주목받는 사람은 극소수인데, 그 조명을 받는 상위 직급에 있는 디자이너는 대부분 남성이야. 그러다 보니 업계 안에서
여성 디자이너는 ‘오래 일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을 역할’로 대하고, 남성 디자이너끼리 알음알음 서로를 끌어주는 일이 많이 있고.이런 문화가 여성을 낮은 위치에서만 계속 일하게 만드는 거지. 그렇게 일하다보면 지치는 건 당연하고.
소미 ‘사라진다’는 말이 함정 같기도 해.
여성 디자이너가 차별적인 근무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실제론 존재하고 있음에도 조명이 제대로 안 돼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가끔은 이런 말이 족쇄처럼 여성 디자이너에게 다가올 때도 있는 것 같아. 평가절하되고 스스로도 패배주의적인 사람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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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 밀리언아카이브에서 열린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FDSC) 첫 설명회 모습. 라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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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은 결국 직급별로 나타나는 성별격차의 문제다. 디자인계도 여느 분야처럼 직급이 올라갈 수록 여성 비율이 줄어든다. FDSC의 신인아 디자이너가 올해 3월 회사 114곳, 디자이너 1644명의 직급별 성비정보를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 중 남성은 502명(31%), 여성은 1142명(69%)인데 직급이 낮을 수록 여성 디자이너의 비율이 평균보다 높았다. 인턴이나 프리랜서 등 비정규직은 90%, 사원은 76%, 대리·주임은 76%가 여성이다. 중간관리자인 팀장급에선 여성 55%, 남성 45%로 엇비슷하다가 임원급에서 역전된다. 임원급 디자이너 가운데 남성은 87명(74%), 여성은 31명(26%)이다.
중간 관리자급에서 여성 디자이너는 갈림길에 선다. 이들은 그 원인으로 △주니어 시기 중요한 프로젝트 보다 잡무와 격무로 소진 △충분한 실력과 자격이 됨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리더의 자리에 앉히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 △결혼 후 출산 및 육아, 돌봄노동에 더 많은 책임을 지우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꼽았다.
―성별에 따른 차별을 어떤 때 체감해?
경희 소규모 회사를 다닐 땐 1인당 하나씩 프로젝트를 했음에도 늘 대표의 이름만 매체에 실리고 정작 나는 보조로 이름이 들어가곤 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꽤 많은 디자인 스튜디오가 ‘남성 대표+여성 직원’으로 구성돼 있거든.
여성은 계속 보조적인 존재로 있을 수 밖에 없는 구조야. 사실 학교 때부터 남학생들은 “나는 스튜디오를 낼 거야”라고 거침없이 생각하는데 여학생들은 “취직이 최우선이야”라며 안정적인 성향을 추구하는 것 같거든. 이런 문화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
수영 학창시절부터 여성은 ‘부반장’을 하는 것처럼 부차적인 역할에 익숙하잖아. 그래서 회사 안에서도 주된 역할을 해 나가는 모습을 아예 그리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
경희 4학년 때 졸업전시를 하는데 내가 위원장을 했거든. 그동안은 대부분 복학생인 남성이 해왔던 자리야. 내가 맡으니 “진짜 해볼 수 있겠어?”라며 불신하고 못 미더워 하더라고ㅎㅎ
소미 우리도 졸업전시 때 위원장, 부위원장 모두 여성이었는데 교수님이 “왜 둘 다 여자야?”라고 묻더라고. 당시 학생이 100명 이상이 여성이고 10명 정도만 남성이었는데도, 남성이 대표인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겨졌던 거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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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에 열린 ‘FDSC 1주년 기념 총회’ 모습. 이주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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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성 디자이너를 보여주고 소개하고 연결합니다
FDSC가 여성 디자이너의 존재를 자꾸 드러내고 널리 알리고 연결하는데 힘을 쏟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계정을 통해 페미니스트 디자이너의 작업물과 소식을 함께 소개하는 ‘페디소’(페미니스트 디자이너를 소개합니다)를 진행하고, ‘FDSC 디자이너 리스트’에 등록한 회원은 디자이너를 구하고자 하는 클라이언트에게 먼저 알려 연결을 돕기도 한다. 여성 디자이너가 더 오래 일하며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선, 서로 도우며 함께 성장해야 가능하다는 믿음이 이들에겐 있다.
―여성 디자이너의 ‘지속가능한 커리어’가 가능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선 어떤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경희 동등한 기회분배?
결국엔 다양한 위치에 있는 디자이너를 조명하고 그들에게 발언의 기회가 주어질 때 여성 디자이너에게도 ‘지속가능한 커리어’가 가능해질 거라고 생각해.
수영 내가 어렵다고 판단하는 의뢰가 들어오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누군가를 추천하려고 해. 좁은 판에서 단가 경쟁을 하며 질을 낮춰서 일을 몰아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실력을 발휘하며 좋은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게끔.
서로의 이름을 말해줄 때 지속가능해지는 것 아닐까.이를 위해 여성 디자이너가 실질적으로 교류하는 일이 필요한 것 같아.
―FDSC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어떤 거야?
소미 ‘생활밀착형 디자인 팟캐스트’인 ‘디자인에프엠(FM)’이야. 여성 디자이너가 보조적인 존재가 아님을, 다들 멋진 멘토가 될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각자의 고민을 나누고 싶었어. 디자인 업계 안에서 일종의 언론 역할을 하고 싶었달까? 라디오 작가가 꿈이었던 수영이 대본을 쓰고 나랑 경희가 진행을 맡고ㅎㅎ
수영 지금은 책 작업을 하고 있어. 어려운 디자인 업계 용어는 다듬고, 시각자료도 더하고. FDSC에 들어와서 1년 동안 한 일 중 가장 흥미진진한 일이었어. 정말 많은 디자이너들을 만날 수 있었거든.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잘 존재하고 있구나”라는 걸 느끼기도 하고. “이렇게 다들 일을 잘하고 똑똑하고 멋진데 왜 다 몰라주는 거야. 세상이 다 알았으면 좋겠다”싶기도 하고ㅎㅎ
올해 5월 처음 제작한 팟캐스트 ‘디자인에프엠(FM)’ 역시 회사나 상사의 이름에 가려진 여성 디자이너의 삶을 직접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다. 광고 섭외부터 편집까지 FDSC 안의 디자이너 8명이 함께 참여해 만들었다. 1인 스튜디오부터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디자이너까지 다양한 이들을 섭외해 총 6회에 걸쳐 소개했고, 책으로도 담아낼 예정이다. 크라우드 펀딩을 받아 제작한 책은 오는 15일 출간된다. 펀딩엔 목표금액의 3배에 가까운 1271만원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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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희, 김소미, 김수영씨 등이 팟캐스트 ‘디자인에프엠(FM)’을 진행하는 모습. 우유니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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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페미니스트 디자이너를 위한 안전망
“나이, 성별, 성 정체성, 성 지향, 장애 여부, 국적, 피부색, 출신 지역, 학력 등과 관계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이 곳의 또다른 원칙은 “존중과 지지를 바탕으로 활동하고 질문과 제안, 실수와 실패를 모두 환영한다”는 것이다.
모든 질문은 반드시 누군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주저말고 묻고 이야기하는 것, 좋은 소식은 꼭 알려 공유하고 축하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나서길 꺼려하거나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지 않고, 여성들이 자신있게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FDSC가 각자의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궁금해.
경희 서로가 가진 장점을 인정하고, 해보라고 장려하고, 비방하지 않는 것.이런 게 긍정적인 에너지로 다가오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더 열심히 하고 싶기도 하고.
수영 “실수와 실패를 모두 환영한다”는 문장의 힘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더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갖게 되기도 하잖아. 그런데 여기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실수하고 실패해도 더 나은 안을 찾도록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해보면 된다”고 해. 그런 모습들이 좋았어.
소미 박봉과 야근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업계에서 패배주의적인 분위기를 먼저 학습하게 되거든. 내가 극소수의 천재적인 디자이너가 아니라면 다 망할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그런데 FDSC 활동을 하면서는
‘내 자리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내 주변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게 제일 큰 것 같아. 낮은 연차의 여성 디자이너도 내 작업을 보여주고 자랑해도 괜찮다는 것, 어떤 실험이라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FDSC가 존재하는 거지.
―FDSC가 페미니스트 디자이너를 위한 일종의 ‘안전망’ 같은 역할을 하는 거네.
소미 응응. 조금씩 시도하고, 작은 성공을 해보고, 나의 효능감을 얻을 수 있는 곳? ‘나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네’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곳? 회사 일에 치이다 보면 그런 걸 느끼기 어렵잖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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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SC가 바꾸고자 하는 디자인 업계의 문화. 이들은 ‘여성이 배제되지 않는’ 디자인 업계를 만들기 위한 규칙을 직접 만들고 실천하고 있다. FDS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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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페미니스트 모멘트는 언제야?
수영 나는 지난해 8월 ‘디자이너의 적정단가’란 주제로 열린 FDSC 타운홀 행사에 참석하고 여기 가입했던 날. 지난해 나의 정체성이나 일의 지속성에 대해 생각이 많았거든. 귀엽고 아기자기한, 소위 말하는 ‘여성스러운’ 디자인을 잘 한다고 평가를 받거나 반대로 “너의 디자인은 너무 여성적이야”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혼란스럽기도 했고. 야근과 박봉은 나의 실력 부족 때문인가 싶어 고민도 많이 했고. 그러다 FDSC를 알게 되고 행사에 참여한 건데,
직접 실천하고 말하는 다른 여성 디자이너들을 보면서 오랜만에 심장이 뛰었어.무엇이든 바뀌어야 한다고 느꼈고, 그 시작은 나의 변화라고 생각해 뭐라도 실천하자고 다짐했고.
소미 나는 2016년 10월 터져나왔던 ‘#문화계_내_성폭력’, ‘#디자인계_내_성폭력’ 사건에 연대하면서야. 이전에도 여성 디자이너들과 교류하면서 페미니즘을 디자인 분야에서 어떻게 실천하면 좋을지 고민을 시작했는데 사건 이후에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거지.
사실 모든 여성들이 문화계 안에서 소외되고 성폭력에 노출되고 하는데, 이런 일들이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조 자체에 큰 문제가 있어 일어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어. 그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점점 더 생각해보게 된 거지.
경희 나는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내면의 페미니즘을 확실하게 밖으로 이끈 계기가 된 것 같아. 이 사건이 두고두고 회자되며 여성인권이 좀 더 나아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텀블벅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하얀리본 뱃지’를 만드는 작업을 했거든. 펀딩에 성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어.
더 강한 연대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했고.
이들에게 페미니즘은 “‘나도 해볼 수 있겠는데?’라며 질문할 수 있게 만드는 용기이자 건설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도구”(수영)이고, “일상 속 차별을 깨닫고 바꾸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소미)이다. “어떤 행동과 생각을 할 때 무엇을 우선 순위로 둬야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삶의 기준점”(경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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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SC가 개최한 워크숍 모습. ‘참지 않는 세대가 왔다’ ‘나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다’라는 문구를 넣은 깃발을 들고 있다. 강경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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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SC가 뒤집고 해체하는 판은 어떤 모습이 될까?
소미 공정거래가 이뤄지는 디자인 업계, 그리고 이를 위해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하는 것! 술자리에서 알음알음 이야기를 하고 노하우를 전수받는다면 여성 디자이너는 그런 기회에서 계속 소외될 수밖에 없거든.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하면, 꼭 여성들에게만 유리한게 아니라 다른 사회적 약자에게도 더 나은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럼 디자인 업계 문화나 노동환경도 전체적으로 더 좋아질 거고.
경희 여성들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는 판! 여성들이 칭찬에 익숙치 않다 보니 칭찬을 받아도 잘 안 믿더라고ㅎㅎ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데, 여성이 좀 더 연대를 하고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어.
수영 FDSC안에서 서로 “잘했다” “이런 점이 좋다”는 피드백을 주고 받거든. 그러면서 늘 “난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없고 스스로를 의심하던 부분이 많이 깨졌어. “기고 해볼래요?” “인터뷰 해볼래요?”라고 권하니 이런 기회도 주어지고, 기회가 늘어나니 성취감도 늘고 자신감도 생기고.
이런 변화를 더 많은 여성 디자이너가 겪었으면 좋겠어.
FDSC를 통해 이들은 “자기검열을 강박적으로 하지 않게”(수영) 되거나 “패배주의에 빠지는 대신 당당히 내 몫을 요구하고 변화를 만들어내자고 다짐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소미)고 말한다. “지향점이 비슷한 동료를 만나 협업하는 것이 개인과 그룹 모두가 발전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경희)고도 했다.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 이를 통해 더 많은 여성 동료를 만나 연대할 때 내가 서 있는 판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뀐다는 걸 이들은 몸소 경험하고 있었다. 판은 어쩌면 이미 뒤집어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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